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리 4세 (문단 편집) ==== 호색한? 오입쟁이? ==== 유명한 사실이지만, '''여색을 무진장 밝혔다'''. 이명 "Le vert galant"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엄연한 정실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앙리 4세는 일생을 통들어 거쳤던 여인의 수가 '''50여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덕분에 그의 또다른 별명은 '''팔팔한 오입쟁이'''였다. '''재미있는 것은 [[프랑스]] 국민들이 오히려 이 때문에 앙리 4세를 더 좋아했다는 것'''. 현대의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사실 당시 프랑스가 남녀를 불문하고 성적으로 굉장히 문란한 편이긴 했다.[* 현대의 [[프랑스]]도 크게 다르진 않다. 전임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도 그렇고, [[니콜라 사르코지]]도 그랬고, 현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도 여자문제가 굉장하다. [[나폴레옹 3세]]도 도시마다 [[정부]]를 둘 정도로 여색이 대단했고 대통령궁에서 오입질을 하다 [[복상사]]한 [[펠릭스 포르]]도 있다. 그러함에도 프랑스 국민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거 보면, 그냥 [[프랑스인]]이라는 사람들 자체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정부를 한 명도 두지 않고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만 충실했던 [[루이 16세]]는 성 불구 루머에 시달리며 심각하게 바보 취급을 받았으니, 그야말로 [[영웅호색]]이라는 말이 진담으로 통용되던 시절의 일이라고 해야 할까. 다만 말년에 15세 소녀에게 빠져 자신의 봉신과 위장결혼시키려고 했으나 봉신이 이를 눈치채고 소녀를 자기 영지로 데려가버리자, 그 소녀를 되찾겠다고 전쟁까지 벌이려고 한 것은 당대에도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물론 15세가 문제인 건 아니다-- 공교롭게도 전쟁준비 중이었던 앙리 4세가 암살당하면서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그 중 가장 충격적인 일화는 앙리 4세보다 무려 41세나 어렸던 샤를로트 드 몽모랑시와의 러브스토리다. 당시 55세이자 금사빠이던 앙리 4세는 14세의 명문가 소녀 샤를로트와 사랑에 빠졌다. 한창 꽃다운 나이의 이 소녀를 외간 남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앙리 4세는 실로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는데, 바로 샤를로트를 자신의 당질이자 [[동성애자]]였던 콩데 대공 앙리(당시 20세)와[* 앙리 4세의 사촌인 콩데 대공 앙리 1세 드 부르봉의 아들인 '''앙리 2세'''이며, 훗날 '대 콩데'로 불리는 [[루이 2세 드 콩데 부르봉|콩데 대공 루이 2세]]의 아버지이다.] 결혼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콩데 대공 앙리 2세는 남자를 좋아한 거지 부인을 공유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샤를로트와 함께 네덜란드로 도주했다. 현시점에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앙리 4세의 파란만장한 러브라이프는 프랑스 사회에 엄청난 파급력을 몰고 왔다. 2번이나 개종한 이력이 있는데다가[* 당시 가톨릭 교회는 한번의 개종은 '실수'로 받아들이며 허용하고 있었다.] 항시 종교적 문제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보였던 앙리 4세는 개신교와 가톨릭 두 진영 모두에게 버림받고 말았다. 다만 앙리 4세는 정략이나 계산 때문에 호색한으로 알려진 역사상의 다른 군주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정부들이 단순히 즐기기 위해 잠시 만났던 정도였다. 심지어 그렇게 만난 정부들의 나이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 또 어떤 의미로든 대단하다. 다만 정부 중 하나였던 [[가브리엘 데스트레]]는 엄청나게 아껴서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이혼한 후에는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려고 했다. 문제는 가브리엘이 결혼식 직전에 죽어버렸다는 것. 이렇게 여색을 밝혔으니 가정생활도 당연히 막장이었다. 심지어 첫 번째 아내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는 앙리 4세와 서로 거침없이 맞바람을 피우고 다녔다.[* 사실 마르그리트가 후사를 낳지 못해서 그랬다는 설도 있다.] --당연하지만 실드는 불가하다-- 하지만 이와 무관하게 마르그리트는 앙리 4세와의 합의로 이혼한 후에도 '프랑스의 공주이자 왕비' 지위를 유지했고, 앙리 4세와 그의 2번째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는 물론 그녀가 낳은 앙리 4세의 자식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이러한 호색적인 기질로 인해서 2번째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와도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한술 더떠 앙리 4세는 마리에게 자신의 사생아들과 마리 소생의 왕자녀들이 함께 교육을 받도록 강요했고, 사생아들에게 '내 아들'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게 했다. 앙리 4세가 쉴리 공작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우리 부부의 불화를 하루 내에 해결하지 못하면, 마누라는 5일이나 삐져있다"''' 며 불평했다. 허구헌날 [[부부싸움]]을 벌이는 두 부부를 말리러 쉴리 공작이 항상 호출받았다고 한다. 첫 번째 왕비와 이혼하고 두 번째 왕비를 맞아들이는 바람에, 아들 [[루이 13세]][* 장남인 [[루이 13세]]와는 무려 48세 차이가 났다. 한술 더 떠 손자인 [[루이 14세]]와는 '''85세나''' 차이가 났다. ]를 늦게 본 것이 약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